자 일단 경제학사부터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근대 경제학은 아담 스미스로부터 시작하지만 그 이전에는 중상학파와 중농학파가 있었습니다. 중상학파는 경제에 있어 금은으로 상징되는 귀금속이 국부(國富)라고 생각하여 금은을 닥치는대로 국경 안으로 모으는데만 집중했습니다. 때문에 보호무역주의가 성행하게 되고 국가가 나서서 산업을 장려하는 일이 흔했죠. 영국에서는 플랑드르 지방(지금의 벨기에) 해안가에 '영국에서 임금을 후하게 줄테니 건너와라'라는 내용이 담긴 삐라를 뿌려서 직물공들을 빼가기도 했습니다. 그 이외에도 기술자의 유출을 막기 위해 별의별 제한을 다 하고 영국에서는 양모의 불법적 유출을 막기 위해 양모를 실은 마차는 특별한 표식을 해야했습니다.
아담스미스는 이러한 경향을 비판하며 국가의 부가 귀금속에서 나오지 않으며 인간의 노동으로부터 즉, 부가가치의 생산으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종합하면 노동이 상품에 가치를 부여한다는 노동가치론을 주장했습니다. 이로부터 고전학파의 오랜 전통인 노동가치론이 등장합니다. 노동가치론은 리카르도-JS(종석)밀로 이어지고 이는 마르크스에게 계승됩니다. 사실 마르크스가 그런 측면에서 고전학파의 적자라고 할 수 있죠. 나머지는 다 고전학파의 이단이고 배신자들입니다(죽어라 얏얏)
그렇다면 종석 밀로부터 나온 다른 한 쪽의 배신자들은 뭘 믿으러 갔냐 하면 바로 한계효용입니다. 제가 이번 주 내내 싸워 온 빠레또(새누리당 국회의원이신 이만우 교수의 발음을 옮겨 왔습니다) 같은 사람들이 이 한계효용이론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죠. 한계효용은 세 명의 경제학자에게 거의 동시에 나옵니다. 이들은 영국의 제본스, 오스트리아의 멩거, 그리고 프랑스의 왈라스(사실 정확한 발음은 발라스 라고 합니다. 불어 이름이지만 뒤의 s를 발음 하는 것이 가문의 전통이라고 박만섭 교수님이 그러시더군요)입니다. 이들의 한계효용이론은 서로 알고 그런 것도 아닌데 거의 동시에 거의 유사한 내용이 나오게 됩니다. 이를 경제학사에선 '한계혁명'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한계효용은 노동가치론에 어떤 영향을 주었느냐 하면 노동가치론을 폐기시켰습니다. 즉, 물건의 가치가 노동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물건을 사용하는 사람의 주관적인 만족으로부터 온다고 정의하면서 노동가치론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이에는 오스트리아 학파의 주관주의적 해석도 있었고 에지워스의 기수적 효용 파레토의 서수적 효용에 이어서 현시선호이론도 나오지만 이런건 알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이 한계혁명 이후 기라성 같은 마셜과 케인즈가 나오고 이후 경제학계는 완전히 케인지언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이들은 한계효용의 바탕 아래 그 이론을 전개했기 때문에 주류경제학에 속했습니다. 70년대 이후 프리드먼 등의 등장과 RBC이론의 전개 등으로 케인지언은 대부분 사라지고 신고전학파종합이 결성되어 최근까지 왔습니다.
종석 밀의 책을 마르크스도 읽었습니다. 종석 밀의 경제원론 책은 맨큐의 경제학(별로 좋은 책도 아닌데)처럼 많이 팔렸거든요. 경제학 책으로 떼돈 번 사람이 경제학계엔 밀, 마셜, 사뮤엘슨 이렇게 세 사람이 있습니다. 이제 맨큐도 추가군요. 아 뭐 여튼 마르크스는 노동가치론을 밀고 나갔고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 중 스라파와 칼레츠키라는 두 명의 포스트 케인지언의 원류 격인 학자들이 등장합니다. 스라파의 이름은 많이 들어 보셨을 겁니다. 스라파는 본래 이탈리아의 경제학자로 아버지는 법대 교수였습니다. 무솔리니 집권 이후 스라파가 자꾸 신문에 무솔리니를 비판하는 글을 올리자 파시스트 정권은 스라파의 아버지를 통해 스라파에게 압력을 넣으려 합니다. 그러자 스라파의 아버지가 이렇게 대답했다 하는군요 "내 아들이 그랬다면 그게 맞을 거요."
스라파는 결국 케인즈가 파시즘을 피해 영국으로 빼내옵니다. 칼레츠키도 유사한 경우였습니다. 사실 칼레츠키는 케인즈보다 유효수요이론에 관한 논문을 더 일찍 발표하지만 폴란드어로 되어 있어서 주목받지 못합니다.(학문하려면 역시 천조국 말을 해야합니다) 그도 케인즈가 폴란드의 전화에서 빼내서 영국에서 학문 활동을 하게 됩니다.
스라파에 대해서는 일화가 있는데 이 사람 논문도 지지리 안 쓰고 그랬지만 한 때 마셜도 논박할 정도의 날카로운 사람이었습니다. 평생 쓴 논문 갯수도 몇 개 안 된다고 하는데 이는 그의 완벽주의 성격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강의를 맡다가 케인즈에게 도저히 못 맡겠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강의 준비를 완벽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해서"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케인즈는 스라파에게 케임브리지 대학교 마셜 도서관(경제학 도서관)의 사서 자리를 주고 대학원생들 지도만 맡겼다고 하죠. 스라파는 평생 사서로 살다 죽습니다.
그리고 포스트 케인지언에서는 케인즈가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합니다만 논란이 많은 것은 알고 있습니다. 케인즈는 자본론을 읽은 뒤 "별 특별한게 없는, 뻔한 이야기"라며 던져 버렸다고 하죠. 그렇지만 거만한 영국 엘리트 특유의, 남의 영향을 받은 걸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그런 태도를 보이게 했다는 추측도 있습니다.
포스트 케인지언들은 여기서, 칼레츠키, 스라파, 케인즈, 그리고 마르크스의 이론을 빼와서 새로운 학문체계를 구축합니다. 케인즈의 이론을 발전시킨다는 이름에서 학파 이름은 포스트 케인지언이 되었죠. 각각의 사람들이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앞으로의 포스팅에서 얘기할 것 같습니다.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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