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30일 일요일

Letter to the Queen

2009년 서브프라임 위기 이후 영국 여왕이 경제학자들에게 왜 경제학은 위기를 예측하지 못했냐는 질문을 하였고 이에 영국 학술원은 영국 여왕에게 이에 대한 답변으로 서신을 보냈습니다. 그 전문을 번역하여 싣습니다.

폐하

폐하께서 런던 정경대를 지난 11월 방문하셨을 때, 폐하께서는 아주 합당한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왜 아무도 신용경색이 올 것을 알아 채지 못하였는가?’ 영국 학술원은 2009 6 17일에 폐하의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포럼을 개최하였습니다. 이 포럼에는 전문가부터 사업가, the City, 규제당국, 학자 그리고 정부당국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참석하였습니다. 이 서한은 참석자들의 관점과 논의에서 지목되었던 사안들에 대한 요약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폐하의 질문에 올바른 답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실 이 위기를 내다보았습니다. 그러나 위기가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일어날 것인가 그리고 언제 발생할 것인가 또 위기가 얼마나 심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문제의 본질만큼이나 고려해야 하는 것은 위기의 발생 시점입니다. 발생 시점을 알 때에만 행동할 수 있고 감독 당국이 그 권한으로 문제를 잠재울 수단을 강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경제와 금융시장에 있어서의 불균형에 대한 많은 경고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국제 결제은행은 금융시장에서 리스크가 적절하게 반영되지 않는다고 수차례 경고를 했습니다. 우리의 영국은행(영란은행) 또한 연 2회 발간하는 금융안정보고서에서 누차 경고를 해왔습니다. 리스크 관리는 금융시장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현재 공적 자금에 의해 국유화 된 우리의 주요 은행 중 하나는 4,000명에 이르는 리스크 관리자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개별적인 금융상품이나 대출계약의 리스크를 판단하는 것 보다 시스템 전체의 리스크를 판단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리스크 계측은 금융 활동의 단면으로 국한되며 영국과 전세계의 가장 유능한 수학적 기법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들도 때로는 큰 그림을 보는데 실패하곤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계경제에 있어서의 불균형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대미문의 세계적 호황을 누렸고, 특히 저개발국인 인도와 중국에서 그러한 호황으로 인해 삶의 수준이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번영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세계적 저축 과잉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는 상대적으로 더 안전한 장기 자산의 수익률을 떨어뜨렸고 때문에 많은 투자자들은 더 큰 위험을 감수하고 더 높은 수익을 얻기 위해 뛰어들었습니다. 영국이나 미국 같은 국가들은 중국의 부상으로 인해 많은 상품들의 가격이 낮아져서 이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영국의 가계와 기업들도 금융시장에 대한 접근이 더 쉬워져서 더 많은 돈을 빌릴 수 있었습니다. 이는 이곳 영국과 미국에서의 주택가격 상승을 더욱 부추겼습니다. 이에 대해 위험성을 경고하는 사람은 많았습니다.

그러나 경고하는 사람들과는 반대로, 많은 사람들은 은행은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금융의 마술사가 리스크 관리의 새롭고 천재적인 방법을 찾아냈다고 믿었습니다. 실제로 몇몇 사람들은 새로운 금융상품의 조합을 통해 리스크를 분산시켜서 사실상 리스크를 제거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자만심으로 구성된, 희망사항이라는 것은 허황된 생각일 뿐입니다. 여기에는 금융시장이 변화했다는 확고한 신념 또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정치인들이 시장에 도취되었습니다. 이런 관점들은 작은 리스크와 단기를 예측하는데 적절한 금융경제 모형에 의해 뒷받침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주 극히 일부의 모형들만이 시장이 잘못 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전세계에서 뽑힌 능력 있는 고위 간부들과 이사회 그리고 공적인 삶에서 증명된 경력을 가지고 있는 중견 간부들이 이끌어 나가는 은행을 신뢰하였습니다. 누구도 자신들의 판단이 틀릴 수 있다거나 그들이 경영하고 있는 금융기관에서 리스크를 능숙하게 검토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한 세대의 은행가들과 금융가들은 자기자신을 스스로 기만하고 그들을 선진 경제의 Pace-making engineer로 생각했던 사람들을 속였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낙관적 여론의 존재 하에서 이러한 발전의 진행 속도를 늦추는데 어려움을 노정(露呈)했습니다. 가계는 낮은 실업률에서 이익을 보고 있었고 신용과 싼 상품가격에서도 역시 이익을 보고 있었습니다. 기업들도 낮은 대출 이자율의 혜택을 보고 있었습니다. 은행가들은 엄청난 보너스를 받으며 그들의 사업을 전세계로 확장하고 있었습니다. 정부는 세수가 늘어나 학교와 병원에 대한 공공지출을 늘릴 수 있었습니다. 이는 부인(否認)의 심리학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이 순환은 점점 더 힘을 얻었으나 그 것은 선순환이 아니라 망상과 착각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위험들을 관리하도록 임무를 부여 받은 감독당국들에도 어려움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파티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판을 깨야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이에 필요한 수단이 있었을 때나 할 수 있는 얘기입니다. 전반적으로 규제 완화에 대한 압박이 있었습니다. City of London(과 금융서비스 당국)은 이런 이유 때문에 세계적 금융 규제의 모범으로 칭송 받았습니다.

주식시장과 주택시장의 버블을 미리 잡기보다는 이후의 후유증에 대처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는 합의가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이는 미국에서의 경험에 의해 뒷받침 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2000년대로 접어 들어서 닷컴 버블 붕괴 이후 경기후퇴를 다소간 피해갔습니다. 이런 생각이 우리가 버블 붕괴 이후 경제를 구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관점에 힘을 실어줬습니다.

인플레이션은 낮아서 경제가 과열되었다는 경고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영국은행의 통화정책 위원회는 위원회의 권한으로 종래에 볼 수 없었던 낮고 안정적인 물가상승률을 달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이자율이 역사적인 기준에 비추어 낮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일부는 정책이 위험을 막는데 역부족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일부 국가들은 풍향과 반대로 구부리기 위해이자율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퍼져있던 관점은 통화정책은 인플레이션을 방지하기 위해 쓰는 것이 가장 좋고 경제의 거대한 불균형을 통제하는데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어디서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까?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일을 각자의 가치에 따라 적절하게 수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성공의 표준적인 측정방법에 의하면 그들은 보통 잘하고 있었습니다. 실패는 서로 연결된 불균형의 총계적인 수준을 보지 못하는 데서 왔습니다. 이는 집단적 심리와 금융, 정책 결정자들의 주문(呪文)과 결합되어 위험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개별적 위험은 적절히 분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 체제에 걸친 리스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폐하께 요약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위기의 시기, 정도, 심도(深度)에 대해 예측하는 데 실패하였고 이에 대처하는데도 실패했습니다. 많은 이유가 있었다고 하지만, 위기는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영국과 전세계의 사람들의 집합적인 망상에서 주로 기인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체제 전반에 걸친 위험을 이해하는데 실패했습니다.

폐하의 질문의 핵심이 예측실패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영국 학술원은 폐하의 재무성, 내각, 기업혁신성(Department for Business, Innovation & Skills), 영국은행, 금융감독당국의 신료들이 어떻게 새로운, 좀더 멀리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폐하께서 다시는 이런 질문을 하시지 않도록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견을 제시할 것입니다. 학술원은 좀더 광범위하게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아야 할문제에 대해 토론하기 위해 세미나를 개최할 것입니다. 저희는 그 결과를 폐하께 보고 드릴 것입니다. 과거의 사건들은 유익한 충격을 가져왔습니다. 이 충격이 정말로 유익한지 아닌지는 우리가 솔직하게 교훈들을 분석하고 미래에 적용하는지에 의해 결정될 것입니다.

We have the honour to remain, Madam,

Your Majesty’s most humble and obedient servants

2013년 6월 28일 금요일

Post Keynesian Economics(1)-경제학사

자 일단 경제학사부터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근대 경제학은 아담 스미스로부터 시작하지만 그 이전에는 중상학파와 중농학파가 있었습니다. 중상학파는 경제에 있어 금은으로 상징되는 귀금속이 국부(國富)라고 생각하여 금은을 닥치는대로 국경 안으로 모으는데만 집중했습니다. 때문에 보호무역주의가 성행하게 되고 국가가 나서서 산업을 장려하는 일이 흔했죠. 영국에서는 플랑드르 지방(지금의 벨기에) 해안가에 '영국에서 임금을 후하게 줄테니 건너와라'라는 내용이 담긴 삐라를 뿌려서 직물공들을 빼가기도 했습니다. 그 이외에도 기술자의 유출을 막기 위해 별의별 제한을 다 하고 영국에서는 양모의 불법적 유출을 막기 위해 양모를 실은 마차는 특별한 표식을 해야했습니다.

아담스미스는 이러한 경향을 비판하며 국가의 부가 귀금속에서 나오지 않으며 인간의 노동으로부터 즉, 부가가치의 생산으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종합하면 노동이 상품에 가치를 부여한다는 노동가치론을 주장했습니다. 이로부터 고전학파의 오랜 전통인 노동가치론이 등장합니다. 노동가치론은 리카르도-JS(종석)밀로 이어지고 이는 마르크스에게 계승됩니다. 사실 마르크스가 그런 측면에서 고전학파의 적자라고 할 수 있죠. 나머지는 다 고전학파의 이단이고 배신자들입니다(죽어라 얏얏)

그렇다면 종석 밀로부터 나온 다른 한 쪽의 배신자들은 뭘 믿으러 갔냐 하면 바로 한계효용입니다. 제가 이번 주 내내 싸워 온 빠레또(새누리당 국회의원이신 이만우 교수의 발음을 옮겨 왔습니다) 같은 사람들이 이 한계효용이론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죠. 한계효용은 세 명의 경제학자에게 거의 동시에 나옵니다. 이들은 영국의 제본스, 오스트리아의 멩거, 그리고 프랑스의 왈라스(사실 정확한 발음은 발라스 라고 합니다. 불어 이름이지만 뒤의 s를 발음 하는 것이 가문의 전통이라고 박만섭 교수님이 그러시더군요)입니다. 이들의 한계효용이론은 서로 알고 그런 것도 아닌데 거의 동시에 거의 유사한 내용이 나오게 됩니다. 이를 경제학사에선 '한계혁명'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한계효용은 노동가치론에 어떤 영향을 주었느냐 하면 노동가치론을 폐기시켰습니다. 즉, 물건의 가치가 노동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물건을 사용하는 사람의 주관적인 만족으로부터 온다고 정의하면서 노동가치론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이에는 오스트리아 학파의 주관주의적 해석도 있었고 에지워스의 기수적 효용 파레토의 서수적 효용에 이어서 현시선호이론도 나오지만 이런건 알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이 한계혁명 이후 기라성 같은 마셜과 케인즈가 나오고 이후 경제학계는 완전히 케인지언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이들은 한계효용의 바탕 아래 그 이론을 전개했기 때문에 주류경제학에 속했습니다. 70년대 이후  프리드먼 등의 등장과 RBC이론의 전개 등으로 케인지언은 대부분 사라지고 신고전학파종합이 결성되어 최근까지 왔습니다.

종석 밀의 책을 마르크스도 읽었습니다. 종석 밀의 경제원론 책은 맨큐의 경제학(별로 좋은 책도 아닌데)처럼 많이 팔렸거든요. 경제학 책으로 떼돈 번 사람이 경제학계엔 밀, 마셜, 사뮤엘슨 이렇게 세 사람이 있습니다. 이제 맨큐도 추가군요. 아 뭐 여튼 마르크스는 노동가치론을 밀고 나갔고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 중 스라파와 칼레츠키라는 두 명의 포스트 케인지언의 원류 격인 학자들이 등장합니다. 스라파의 이름은 많이 들어 보셨을 겁니다. 스라파는 본래 이탈리아의 경제학자로 아버지는 법대 교수였습니다. 무솔리니 집권 이후 스라파가 자꾸 신문에 무솔리니를 비판하는 글을 올리자 파시스트 정권은 스라파의 아버지를 통해 스라파에게 압력을 넣으려 합니다. 그러자 스라파의 아버지가 이렇게 대답했다 하는군요 "내 아들이 그랬다면 그게 맞을 거요."

스라파는 결국 케인즈가 파시즘을 피해 영국으로 빼내옵니다. 칼레츠키도 유사한 경우였습니다. 사실 칼레츠키는 케인즈보다 유효수요이론에 관한 논문을 더 일찍 발표하지만 폴란드어로 되어 있어서 주목받지 못합니다.(학문하려면 역시 천조국 말을 해야합니다) 그도 케인즈가 폴란드의 전화에서 빼내서 영국에서 학문 활동을 하게 됩니다.

스라파에 대해서는 일화가 있는데 이 사람 논문도 지지리 안 쓰고 그랬지만 한 때 마셜도 논박할 정도의 날카로운 사람이었습니다. 평생 쓴 논문 갯수도 몇 개 안 된다고 하는데 이는 그의 완벽주의 성격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강의를 맡다가 케인즈에게 도저히 못 맡겠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강의 준비를 완벽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해서"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케인즈는 스라파에게 케임브리지 대학교 마셜 도서관(경제학 도서관)의 사서 자리를 주고 대학원생들 지도만 맡겼다고 하죠. 스라파는 평생 사서로 살다 죽습니다.

그리고 포스트 케인지언에서는 케인즈가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합니다만 논란이 많은 것은 알고 있습니다. 케인즈는 자본론을 읽은 뒤 "별 특별한게 없는, 뻔한 이야기"라며 던져 버렸다고 하죠. 그렇지만 거만한 영국 엘리트 특유의, 남의 영향을 받은 걸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그런 태도를 보이게 했다는 추측도 있습니다.

포스트 케인지언들은 여기서, 칼레츠키, 스라파, 케인즈, 그리고 마르크스의 이론을 빼와서 새로운 학문체계를 구축합니다. 케인즈의 이론을 발전시킨다는 이름에서 학파 이름은 포스트 케인지언이 되었죠. 각각의 사람들이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앞으로의 포스팅에서 얘기할 것 같습니다. 그럼 이만.

포스트 케인지언 경제학 포스팅에 앞서

여러분 안녕하세요. 글을 올린다고 올린다고 하고 일신상의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이제 프롤로그를 쓰게 했습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고등학교 때 소일거리로 이 책 저 책을 읽으면서 경제학 책도 많이 집어 들었습니다. 그 당시 가장 많이 읽었던 경제학책은 장하준 교수의 책이 아니었나 싶네요. 지금은 그의 의견에 찬성하진 않지만 그래도 비주류 경제학으로서 들어가는 길에 확실히 좋은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와 동시에 과외 선생님 집에 80년대 소위 빨간 책을 보면서 마르크스의 책에도 관심을 가져서 정말 수박 겉핥기 식으로 깔짝대다가 대학에 왔죠. 대학에 와서 제대로 된 마르크스 경제학을 배울 꿈에 부풀었는데 이런... 학회 세미나는 그저 그렇고 학과 전공 선택에 딱 한 과목 정치경제학 관련 과목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걸 듣고 나서 B+를 받았습니다. Corn Model로 재생산 표식을 만드는 걸 거의 못 그려서요.

알량한 관심을 가지고 2학년 이후 시험 치고 복학해서 학교에 있는 소위 비주류 수업은 다 들어 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래서 노사관계론과 서양경제사를 들었고 이번 학기 경제학사와 비주류 경제학을 들었네요. 노사관계론은 제도주의랄까 경제사회학이랄까 노동 시장에서의 노사관계에 대한 분석을 단지 고용주와 피고용인 혹은 생산요소시장 분석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 정치, 법, 경영 등 많은 요인을 도입하여 설명하고자 하는 수업이었습니다. 사례 위주 강의라서 케이스 스터디를 하면서 꽤 많은 걸 배웠네요. 그리고 비주류 경제학이 바로 이제부터 포스팅 하려는 포스트 케인지언 경제학입니다.

포스트 케인지언 하면 뉴 케인지언하고 다른게 뭐냐라고 물으실겁니다. 사실 포스트 케인지언 경제학자로서 강단에서 교수로 서 있는 건 제가 들은 수업의 교수님이 한국에서는 거의 유일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교수님은 제가 마이크 조교 한다고 번역하신 케인즈의 일반이론을 손수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앞으로 포스팅할 내용은 거의 전적으로 박만섭 교수님의 수업 내용이라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워낙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라 여러분과 공유하려 하니 부족한 점 있어도 해량해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돌아와서 뉴 케인지언하고 뭐가 다르냐. 뉴 케인지언엔 뭐 맨큐 같은 사람이 있다고들 하죠. 뉴 케인지언은 사실 '신고전학파종합'을 따르고 있는 경제학자들입니다. 신고전학파종합이란 단기에서는 케인즈의 주장대로 불완전고용과 가격 경직성이 존재하지만 장기에서는 신고전학파 혹은 고전학파의 주장대로 완전고용과 가격의 완전 탄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인 근래의 경제학의 흐름을 말합니다. 정말 최근에는 RBC로 대표되는 신고전학파와 뉴 케인지언이 다시 갈라선다고 하는데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포스트 케인지언은 어디서 나왔는가하면 뉴 케인지언보다 훨씬 위로 올라갑니다. 그들의 연원에 대해 알려면 경제학사에 나오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습니다. 자세한 경제학사 강의는 또 김균 교수님의 강의록을 통해 찾아뵐 기회가 있을지 모르나 여기서는 간략히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글이 너무 길어지면 읽으시는데 힘드니 다음 포스팅에서 찾아뵙겠습니다.